인디언 모터사이클 110주년 - 다시 시작되는 전설
‘America’s first Motorcycle.’은 인디언 모터사이클을 수식하는 말이다. 이 수식어는 미국 최초의 모터사이클이었던 것은 물론 미국 최고의 모터사이클이라는 의미로 사용됐다. 누구나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수식어를 사용할 수 있지만,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수식어를 갖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인디언 모터사이클은 자사의 이름을 전설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경쟁 브랜드들에게 인디언은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자,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미국 땅에서 모터사이클이 생산되기 시작한 1901년부터였다.
Since 1901
인디언 모터사이클의 창업주인 조지 M 핸디와(George M. Hendee)와 칼 오스카 헤드스트룀(Carl Oscar Hedström)는 미국 북서부의 메사추세츠 주의 스프링필드에서 모터사이클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스프링필드는 화학약품 및 권총, 공작 기계 등의 공업이 활발했던 도시였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모터사이클 회사인 인디언 모터사이클과 마찬가지로, 가장 오래된 자동차 회사 역시 스프링필드에서 출발했다.
1902년에 이르러 이들은 첫 번째 양산 모델을 선보인다. 첫 양산 모터사이클은 단기통 엔진을 적용하고 체인드라이브 방식을 사용한 모델이었다. 이후, 창업주인 칼 오스카 헤드스트룀은 자사의 모터사이클을 타고, 1903년 모터사이클 최고속 신기록을 수립했다.(약, 시속 90km)
인디언은 1905년에 처음으로 V형 2기통 엔진을 적용한 레이싱 모터사이클을 개발했다. 이들의 V트윈레이서는 기록을 갱신하며 레이스에서 강력함을 과시했고, 이어서 1907년에는 V형 2기통 엔진을 적용한 양산 모델이 개발됐다.
우수한 품질과 높은 성능을 자랑하는 인디언 모터사이클은 매년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1911년에는 미국 내 모든 속도 기록을 갈아 치웠고, 그 결과 1913년에 이르러서는 약 32,000대에 이르는 판매고를 이뤘다. 인디언의 붉은색 페인팅은 고성능을 상징했다.
인디언의 대표적인 엔진인 파워플러스(Power Plus)가 등장한 것은 1916년. 파워플러스 엔진은 61큐빅인치(약, 1,000cc), 협각 42도 V형 2기통 엔진으로 기존의 엔진보다 더욱 강력한 출력를 냈다. 파워플러스 엔진을 장착한 모델의 최고 속도는 시속 94km 정도였다.
미국을 벗어난 인디언
인디언의 창업주는 기술자이자, 경영자였고, 레이서였다. 보다 나은 모터사이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급속한 성장을 이룩한 것은 당연했다. 여기에 레이스에서의 활약은 더욱 그 힘을 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미국 메이커로는 처음으로 맨 섬 투어리스트 트로피(Isle of Man Tourist Trophy)에 참가했을 뿐 아니라 예상을 웃도는 결과를 내놓았다. 1911년 맨 섬 TT에 참가한 고드프리(Godfrey), 프랭클린(Franklin), 무어하우스(Moorehouse) 세 명의 선수는 1,2,3위를 차지하며, 전세계 시장에 인디언 모터사이클의 이름을 떨쳤다.
같은 시절, 속도 기록을 휩쓸었던 제이크 데로지어(Jake Derosier)는 미국 내에서의 기록 갱신에서 만족하지 않고, 영국 브룩랜즈(Brooklands)에서 최고속 신기록을 세웠다. 단순히 최고속 경신 뿐 아니라 약 900회의 더트 트랙과 보드 트랙(나무로 만든 벨로드롬 형태의 트랙) 레이스를 인디언 모터사이클과 함께 했다.
1913년은 인디언 모터사이클이 놀랄만한 성과를 낸 해이지만, 아픔도 있었다. 스타 레이서였던 데로지어가 보드 트랙 레이스 중 발생한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이듬해인 1914년에는 인디언 모터사이클의 창업자 중 한 명인 오스카 헤드스트룀이 견해 차이로 회사를 떠났다. 또 다른 창업자인 조지 헨디도 1916년에 회사를 떠났다.
치프(Chief), 그리고 4기통 인디언의 탄생과 몰락
1차 세계 대전에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면서 인디언은 신형 파워플러스 엔진을 장착한 모터사이클의 대부분을 정부로 납품했다. 때문에 1917~1918 년 사이에는 미국 내에서 제품이 없어서 팔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다. 동시에 많은 딜러들이 인디언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쟁을 통해 인디언 모터사이클을 경험했던 군인들은 미국으로 돌아와서도 인디언을 찾았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 인디언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전쟁이란 극단적이며 혹독한 환경에서 높은 성능을 발휘했을 뿐 아니라, 신뢰성을 입증했다. 이후, 더 많은 이들이 인디언을 찾았고, 경쟁 브랜드의 딜러도 인디언으로 돌아서는 일도 벌어졌다.
1922년에는 인디언 모터사이클의 또 다른 상징과도 같은 치프(Chief) 모델이 등장했다. 기존의 파워 플러스 엔진을 개량한 1000cc 엔진을 먼저 선보이고, 1923년에는 1200cc로 배기량을 확대한 모델이 출시됐다. 이후에도 치프 시리즈는 지속적으로 무수한 개량을 거치며 인기를 높였다.
인디언의 전성기인 1927년에는 에이스 모터 코퍼레이션(Ace Motor Coporation, 이하 AMC)를 인수하며 변화를 꾀했다. AMC는 세로 배치형 직렬 4기통 엔진을 얹은 모터사이클을 생산하던 회사였다. AMC가 1923년에 생산한 스페셜 모델인 ACE XP-4는 시속 208km를 기록한 고성능 모터사이클이었다.
인디언은 AMC의 생산 시설을 본사가 위치한 스프링필드로 옮기고, ‘인디언 에이스’라는 이름의 직렬 4기통 모터사이클을 생산했다. 또한, 1928년에는 인디언 에이스의 명칭을 ‘인디언 401’로 바꾸고, ‘아더 오 레몬(Arthur O. Lemon)’을 전담 디자이너로 영입하는 등의 변화를 시도했다.
고급 모터사이클에 대한 수요가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디언은 4기통 모터사이클에 대한 개발과 생산을 계속했다. 1936년부터 1938년에 이르기까지 인디언은 4기통 엔진의 개량을 추진했다. 배기 및 흡기 향상을 위해 듀얼 캬뷰레터 장착 등의 시도가 이뤄졌지만, 결국에는 오리지널 모델의 형태로 돌아갔다.
치프 시리즈는 1940년에 이르러 그 유명한 ‘라지 스커트 펜더’를 장착했다. 인디언 추장의 머리 장식과도 닮은 라지 스커트 펜더는 그 독특한 형상으로 인디언 모터사이클의 상징이 됐다. 치프 시리즈는 당시의 라이벌 모델에는 없던 리어 서스펜션을 적용해 경쟁력을 높였다.
1940년에는 인디언의 4기통 모델 역시 치프 시리즈의 라지 스커트 펜더와 리어 서스펜션을 적용했다. 하지만 인디언 4기통 시리즈의 생산은 1942년까지였다.
편안한 승차감과 차별화된 디자인을 갖춘 치프 시리즈는 많은 인기를 누렸을 뿐 아니라 성능도 우수했다. 당시의 치프 시리즈는 조금만 손봐도 손쉽게 최고 시속 160km를 넘길 수 있는 저력을 가졌었다.
1950년대에 이르러 파워플러스 엔진은 배기량이 1,300cc까지 확대됐다.
더불어 프론트 서스펜션을 텔레스코픽 방식으로 적용하면서 승차감은 더욱 향상됐다. 하지만 우수한 성능과 품질에도 불구하고 치프 시리즈는 재정적 문제로 인해 1953년 단종되고 말았다.
위기의 시대를 맞이하다
인디언은 1차 세계 대전을 통해 높은 성장을 이룩했다. 2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면서, 미군은 사막에서 사용이 가능한 모터사이클의 개발을 인디언에 의뢰했다. 또 다른 발전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인디언은 이 의뢰를 받아들여 ‘841’ 모델을 개발했다. 841 모델은 독일군이 사용했던 BMW의 R71 모델에서 영감을 얻어 개발된 모델이다.
841 모델은 모토구찌의 그것과 흡사한 가로 배치형 90도 V형 2기통 엔진에 샤프트 드라이브 방식을 채택했다. 프론트 서스펜션은 ‘거더 포크’ 방식을 적용했다. 인디언은 841 모델을 위해 1,000개의 시제품을 만들 정도로 진지하게 프로젝트에 임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작전에 투입된 것은 자동차인 윌리스 MB였다.
납품에 실패한 이후, 인디언 모터사이클은 경영권이 크게 흔들렸다. 1945년에는 랄프 B 로저(Ralph B. Rogers), 1953년에는 브록하우스 엔지니어링(Brockhouse Engineering), 1960년에는 영국의 AMC(Associated Motorcycles of Great Britain), 1999년에는 캘리포니아 모터사이클 컴퍼니(California Motorcycle Company) 등으로 상표권이 움직였다.
미국 최고의 모터사이클로 전세계에 이름을 떨쳤던 인디언 모터사이클은 약 50여년 동안 정체성을 잃고 발전의 기회를 세월 속에 흘려보냈다. 하지만 인디언 모터사이클을 기억하는 모든 이들은 자유롭고 독창적인 모터사이클을 그리워했고 부활을 기원했다.
부활한 인디언 승리의 날개를 달다
많은 이들이 기대했던 인디언 모터사이클의 부활은 현실로 다가왔다. 2004년 스테펜 율리우스(Stephen Julius)와 스티브 히즈(Steve Heese)가 표류하고 있던 상표권을 획득하고, 2009년부터 미국 남동부에 위치한 노스케롤라이나 주에서 치프(Chief) 시리즈를 새롭게 생산했다.
새롭게 공개된 치프 시리즈는 해마다 한정된 수량 만을 시장에 공급했다. 최고급 소재를 사용함과 동시에 과거의 전통을 따르는 모터사이클이 탄생했다. 인디언 모터사이클이 공식적으로 부활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치프 시리즈는 105 큐빅인치(1,720cc) 배기량의 파워플러스 V형 2기통 엔진을 적용했다. 이 엔진은 환경규제에 대응할 수 있도록 전자제어식 퓨얼 인젝션 방식을 도입하고, 유해 배출 가스를 줄이기 위해 삼원촉매 장치와 가열방식의 산소 센서를 내장한 현대적 엔진이다.
물론 인디언 모터사이클의 상징과도 같은 라지 스커트 펜더도 충실하게 재현됐다. 부활한 인디언은 유려한 라인과 정통성을 갖고 있는 엔진을 계승하면서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됐다.
그리고 지난 2011년에 인디언 모터사이클은 또 다른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됐다. ATV로 잘 알려진 폴라리스가 인디언을 인수하게 된 것이다. 보다 큰 규모의 유통망과 막강한 자금력, 기술력을 동시에 갖춘 폴라리스는 어쩌면 인디언 모터사이클에게 또 다른 성장의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폴라리스는 인디언 모터사이클이란 전설적 브랜드의 가치를 누구보다 높게 평가했다. 제 아무리 폴라리스의 기술력이 뛰어나고, 자본력이 탄탄하다 할 지라도 가질 수 없는 역사적 가치를 인디언 모터사이클은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디언의 모터사이클 라인업은 우선적으로 축소됐다. 모델을 늘리는 대신 내실을 탄탄하게 다지며, 옵션을 적용하는 것으로 라인업이 축소되는 것을 최소화했다. 폴라리스의 인수 이후, 아직 뉴모델에 대한 언급은 찾을 수 없다. 하지만 폴라리스의 혁신적인 기술력이 더해진 인디언 모터사이클에 대한 기대는 분명하다. 명실상부한 아메리카 퍼스트 모터사이클의 탄생은 이제 다시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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